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구마사/논란 및 사건 사고/고증 오류 및 역사 왜곡 (문단 편집) ==== 신백정 관련 고증오류 ==== 그리고, 위 장면에서 백정과 화척이 아직 분리되어 있을 조선구마사의 시기에 도축업자를 개백정이라고 부르며 깎아내린다는 것은 [[고증오류]]이다. 조선 세종 이전까지 '백정'은 일반 농민을 일컫는 말이었고, 농민들과 상이한 습속을 유지하며 천대받던 도축업자를 가리키는 말은 양수척(楊水尺), 수척(水尺), 화척(禾尺), 무자리 등이다. 백정이 도축업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된 건 조선시대 세종대 반쯤 화적 떼나 다름없는 화척을 동화시키기 위해 이들도 백정으로 부르게 하고 나서부터다.[* 그조차도 실제론 제대로 되지 않아 민간에서는 구백정과 신백정으로 둘을 나누어 부르며 둘을 달리 다뤘다.] 이후 백정이라 불리게 될 화척이 멸시의 대상이 된 이유는 이들이 한민족과 완전히 상이한 그들의 풍속을 버리지 않고[* [[재가승]]이 정말 [[여진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없듯이 조선 전기까지 화척(백정)들이 여진족, [[거란족]]의 후예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확실한 건 이들의 풍속이 농경민족과 확연히 달랐고, 조선이 건국되고 백수십년에 걸친 노력 끝에 정착시키기 이전까진 심각한 범죄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남녀불문 [[도적|말 타고 활 쏘며 살인, 강도, 방화, 약탈 등 각종 중범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척(세종 이후 백정)이 도살업을 전담하게 된 이유는, 조선 초기까진 분명히 존재했던 백정 외 양인 도축업자들이 농업에 쓸 소를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소 도살 금지령에 자신들의 가업을 폐업했기 때문이다. 원래 고기 많이 먹고 위법 행위를 일삼던 평민 하류[* 신백정은 천민이 아니다. 평민중에 하류로서 사회적 인식은 나빴지만 엄연히 평민으로 만약 노비가 백정을 상하게 만들면 천민이 평민을 상하게 만든데 대한 법률로 처벌받았다. 그래서 신백정 중에서도 항산이 있거나 시류를 잘 읽는 이들은 조선 조정의 동화정책에 호응해서 융화되었다. 4군 6진 개척으로 유명한 최윤덕은 조실부모하고 마을에서 주민들과 섞여 살던 양수척 이웃 아래 성장했고 중종반정 원종공신에 백정이 이름을 올려 인생역전을 이뤄내기도 했다.] 화척(신백정)들은 금지령도 무시했기에 그들이 도축업을 전담하게 된 것이지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이들에게 도살업을 떠넘기고 멸시하게 한 게 아니다.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전국의 살인, 강도범의 절반이 백정'''이며 세조때 백정이 심한 욕설이 되고, 성종대엔 백정이 곧 범죄자를 뜻하게 될 정도로 그들의 범죄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리고 최영 운운하는 대사에 이어지는 대사도 심각한 문제다. > "뭐 그래갖고 조선이라고 달라져분 것도 없응께 하는 말이지. 아니 나라가 바뀌면 맘 놓고 도살해갖고 [[쌀밥|이밥]]에 고깃국 먹고 살라더니 금살도감 만들어갖고 싸그리 다 잡아넣어 버렸잖여 별이 아부지도 그래갖고 잡혀간 거 아니여" > > "그러니까 내말이 그말임매 조선 간나 새끼들 고려 간나 새끼들 다 똑같지비 개간나 새끼들" > > "그려.. 잡어! 고려충신이든.. 조선 간나 새끼들이든 다 잡아불자고" 전술했듯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우금령을 내려 농사에 쓸 소를 보호하려 했고 이것이 백정 외 도축업자들이 사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조선은 맘 놓고 소 도살해서 고기 먹으라고 한 적 없다.''' 신백정이 유랑민에서 벗어나기 이전 조선 태조부터 중종때까지 조선의 신백정 정책은 한결 같았다. 정착시키고 농민들과 동화시키자. 농사짓게 만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농사에 필수인 소 도살 마음대로 하라고 권하는 정부가 어디있나? 그리고 '''백정집단이 북방에서 튀어나오는것도 오류다.''' 조선시대 백정 범죄 기록이나 구한말 형평운동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백정들이 많이 거주한 곳은 남부 지방이다. 명종때 임꺽정이 발호한 황해도 지역부턴 백정범죄가 심각했지만 평안도, 함경도는 지속적으로 사민 정책을 실시했을 정도로 인구가 적어 백정 관련 기록도 거의 없다. 이는 백정이 이민족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방에 대규모 백정 집단이 있었다면 세종대에 백정들을 긁어모아 북방으로 사민시키자는 의견이 나올 일도 없었다. 참고로 조선구마사 사건을 계기로 조명받은 [[근육조선]] 27화에서도 양수척과 화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일개 웹소 작가의 데뷔작도 최소한의 용어 [[고증]]은 했는데, 1995년부터 20년 넘게 각본을 써 온 [[박계옥]] 작가는 이를 무시했다. [[인지도]]가 거의 없는 목조의 이력도 다 안다는 사람이 [[인터넷]]에 한 번 치면 나오는 백정의 명칭의 변천은 여태껏 몰랐단 말인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